2)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천제는 그 위상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태백산 같은 명산(名山)에서 행하는 천제이고, 둘째는 임금이 있는 도성에 임금, 정확하게는 황제의 천제단이라고 할 수 있는 원구단(圜丘壇=환구단)을 쌓고 왕이 직접 행하는 천제이며, 셋째는 소격사라는 관청에서 관리(또는 무당)가 국가의 안녕이나 기우를 비는 초제(醮祭)인데, 강화도 마니산에 관리를 보내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명산에서 행하는 천제는 한민족의 전통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고, 원구단에서 왕이 지내는 천제는 중국과 그 문화를 공유하는데 고려왕조는 지냈는데 조선왕조에 금지되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초제는 무속 또는 도교적 성격이 강한데 옥황상제와 일월성신(별자리)에게 드린다. 조선시대 지배계층인 유생들은 세 가지 천제를 모두 반대했지만 그 중에서도 원구단에서 왕이 직접 행하는 천제를 특히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기(禮記)의 천자(天子) 즉, 황제는 천지(하늘)에 제사하고 제후(왕)는 경내 산천(땅)에 제사한다. (“天子祭天地, 諸侯祭名山大川之在其地者”)는 구절을 근거로 유생들은 제후국인 조선이라는 나라는 감히 천제를 지낼 수 없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가 나약해진 이유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들었다. 사대주의란 섬길 사(事)에 큰 대(大), 즉 마땅히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사상이다. 조선은 사대주의의 나라였지만 자주적인 왕이나 신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록을 살펴보면 “1월 15일 임금이 면복을 갖추고 환구단에 올라 제사를 의식대로 하였다.”(세조실록 세조3년, 1457), “1월15일 친히 환구단에서 제사지냈다.”(세조실록 세조4년, 1458)
매년 정월대보름에 세조는 천제를 지냈던 것이다. 어떤 신하가 감히 세조에게 반대할 수 있었을까 만은 사상적으로 천제는 유교보다 불교에 가까웠고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정도로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인물이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정 할 뿐이다. 세조에 이어 광해군(1608-1623)과 정조(1776-1800)가 천제를 지내려 시도한 기록이 있다.
실리외교를 중시한 광해군은 원구단(환구단)을 복원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조선후기 중흥시대를 연 정조 또한 원구단을 복원하려 천제를 지내려 했으나 역시 신하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정조실록에는 이렇게 전한다. “우리 동방은 나라를 세운 것이 단군(檀君)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역사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쌓아 제천(祭天)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원래 의식(儀式)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니, 의논하여 아뢰라.”(정조실록 정조16년, 1792)
선조는 당대 최고의 학자 율곡이이에게 강화도 마니산 초제(醮祭, 별자리에 드리는 도교 성격의 천제)의 제문을 지으라 명한다. 이에 율곡은 어명을 거부하며 이렇게 답한다. “전하, 그것이 삿된 도(道)임을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조선시대 유생들은 공자와 주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보은의 의미로 명나라 황제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 왕과 신하 등 지배계층은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제후국 신분인 조선이 감히 천제를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수 천 년 내려온 천제문화를 한 순간에 없앨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 지배계층은 삼국시대부터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성현(成俔. 1439-1504)의 허백당집(虛白堂集)에는 “강원, 경상, 충청도의 백성들이 태백산 꼭대기에 당(堂)을 짓고 상(像, 신상/단군상)을 만들어 모시고 제사하는데 철마다 오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어깨를 부딪히고 앞 사람의 발뒤꿈치를 밟을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도 감히 지내지 못하는 천제를 태백산에서는 인근 백성들이 당연한 일처럼 지내고 있었으니 조정에서 태백산 천제를 곱게 볼 리 없었다. 성종실록을 살펴보면 “권주(權柱, `1457-1505)가 말하기를, ”강원도(江原道)는 그 풍속이 귀신이 음사(淫祀)를 숭상하여 태백산(太白山)에 모든 백성들이 가족을 데리고 가서 재계하고 유숙하며 혹은 과부(寡婦)가 여러 날 유숙하는 것도 있으니, 풍속을 손상하고 허물어뜨림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엄금(嚴禁)하게 하소서”라고 말했다.(성종실록 성종 21년, 1490)
이에 임금은 백성들의 태백산 천제를 엄금하라 명한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는 경상도 관찰사 김치(金緻, 1577-1625)가 태백산신사(太白山神祠)를 헐은 것을 두고 미신을 타파한 예로 칭찬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태백산 천제문화는 귀신을 섬기는 미신으로 폄하되었고, 하늘을 만나기 위한 백성들의 순례행렬은 유교문화를 해치는 삿된 풍습으로 매도되어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태백산 천제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큰 변화 없이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다가 조선후기 고종시대 대한제국이 열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민족의 전통이며, 국가적으로 지켜야 할 문화로 인정받는다.
탄압 속에서도 천제문화의 맥을 이은 사람들은 왕이나 관리, 지배계층이 아니라 백성이었고, 그곳은 다름 아닌 민족의 영산 태백산이었던 것이다.